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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유래

차의 유래 -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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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차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매우 성행했으며 특히 불교행사의 연등회, 팔관회등 국가 행사등에서 차를 사용했으며 중엽부터는 전국 차 생산지에 차를 전문으로 생산을 전담케하는 다소21개소를 둠은 물론 공신들에게 차를 하사 할정도로 차가 생활속에서 다반사로 사용되어진 시대다

최 승로의 시무28(982)

두 번째 항목에서 왕이 친히 차를 맷돌에 갈아 국가 행사에서 진차의식을 하였는데, 이를 금지하라고 상소 하였다. 이를 보아 차문화가 성행했음을 엿볼수있다.

뇌원차(腦原茶)(989)

우리나라 토산차에 최초로 붙은 이름으로 시무 28조를 올렸던 최승로가 그의 나이 63세에 죽자(989) 왕이 유족에게 뇌원차 200(), 대차(大茶)10근을 보냈다는 기록등으로 우리나라 최초 토산차이다.
뇌원차는 송나라에서 많이 이용되었던 쪄서 굳힌 연고차에 용뇌향을 섞어만든 뇌향차(1012 -1067:채양의 다록)보다 앞선 차로 단차다.
대차는 옆차로 추정되며 우리 토산차중 옆차의 최초 이름이다.

고려도경의 한국의 토산차맛

송나라 서긍에 의해 지어진 선화봉사 교려도경 40권의 책중 33권의 3편 다조에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서 입에 넣을 수 없으며 송나라에서 보내온 납차(臘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고려에서는 귀히 여긴다고 했지만 이는 우리차를 중국식으로 차를 우려내는등 탕을 내는 과정에서 오는 잘못이 그 이유라 생각 되어진다.

여말 선초의 다소제도

차를 생산하는 주산지에 차생산 만을 전문으로 하는 수공업 단지인 다소가 전국에 21개소를 설치운영했는데 경상도의 화계(하동화계) 달점(고성) 평교(언양)3개소와 전라도에 무장현의 용산, 재역, 남평현, 화순 동복현의 와지다공리(,화순 북면 다곡리 추정)외에 장흥의 거개(현장동면 용곡리 거개) 13개소를 비롯 전라도에 18개소등 총21개소를 설치하고 차를 전문으로 생산하여 토산품으로 바쳐왔다.